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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수 난
1901년 어느날 ‘오신낙’이라는 제주 사람이 정의교당(성읍리)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이 죽음을 둘러싸고 천주교측과, 오신낙 유족들 양측의 주장이 달라 쌍방간의 감정은 격해지고 , 이때 대정현(대정읍)에서도 교단의 폐해를 막기 위해 채구석, 오대현, 강우백, 이성교, 송희수 등이 주동이 되어 상무사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교회측에서 송희수를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전 도민적으로 교회에 대한 봉기가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이 두사건에 의해 제주인들이 일어선 것은 아니였다.
그당시 제주인들은 더 이상 참을수 없을 정도의 고통의 삶을 살고 있었다.
봉건사회 제도하에서 관의 억압에 시달리던 백성에겐 천주의 복음에서 평등과 사랑이 심금을 울렸다. 그리하여 심취하여 입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중에는 외국인 신부의 우월권을 믿고 범법을 다반사로 하는 불량배도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교폐를 빚어 일반 도민으로부터 증오와 규탄을 받게 되었다.
또한, 20여일 동안에 장전을 6만냥이나 거두어 들일정도로 관리의 횡포와 오리의 부패가 심하여 그들의 생활은 빈곤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고통은 이로 끝나지 않고1901년 4월 제주도에 부임해온 봉세관 강봉헌의 임명으로 더욱더 가중된다.
강봉헌 자신뿐만 아니라 교인 불량배를 시켜서 갑오년 이후 없어졌던 민포를 추징하고, 가옥세. 수목세. 가축세. 어장세. 어망세. 염분세, 심지어는 노위세. 잡초세까지 징세하였다. 즉, 봉세관과 불량 교인들이 한편이 되어서 제주 서민들을 괴롭혔던 것이다.
또한, 이 때 교회당의 지배세력은 착한 사람보다는 불량 세력이 강하였으므로 백성의 원성을 사는 일들을 많이 행하였다. 교회를 등에 지고 이미 팔았던 토지와 가옥을 원가로 물려받고 또 고가로 파는 일, 도당을 이루어 민재를 탈취하는 일, 타인의 금지에 무단 매장하는 일, 범법한 자를 교인이라 하여 석방시키는 일, 교인들을 훼방하면 교회당에 잡아다가 사형하는 일 등이다.
여러 가지 상황은 결국 제주 사람들로 하여금 일어서게 만든 요인이 된다.
대정군민들은 격분하여 봉세관과 교회의 작폐를 시정 호소하기 위하여 5월 11일에 제주성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를 안 강봉헌은 10일 배를 타고 이미 도망가고 교회측에서도 13일에 교도 수백명을 대동하고 민당이 모인 곳으로 출발하였다.
이 때 민당은 명월에서 민가에 들어 밥을 먹고 있었는데, 거기서 교인들이 장두를 찾아내기 위하여 무기를 휘두르며 위협하였고, 6명을 잡아 제주목에 넘겼다.
신부와 교도들은 그 길로 5월 15일에 대정현에 이르러, 무기고를 부수고 군중을 향하여 총을 발사하며 닥치는 대로 구타하였다.
양민 김봉년이 총에 맞아 즉사하고 이외에도 2~3명이 총상을 입었다. 이 때 이재수는 흩어지는 군중을 질타하며 민병을 조직했고 5월 16일에 동서로 나누어 제주성을 향하면서 각 마을에 통문하여 장정들을 제주성으로 집결하게 하였다.
민병들은 이재수를 중심으로 황사평(지금의 아라동 부근)에 진을 치고 제주성을 에워싸 봉세관과 천주교도에 대한 처단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자, 무력으로 성을 공략하게 되었다.
곧 제주성을 점령하고 천주교도에 대한 색출과 처단하기 시작하였는데, 관덕정 앞에서 수백명의 천주교도가 처형되었고, 프랑스 신부는 외국과의 상황을 고려하여 처형되지 않았다.
이때, 이재수는 장두라는 호칭을 얻게 되는데, 이는 그당시 머리를 잘라 그 머리를 긴나무막대 끝에 매달아놓는 벌로서, 이러한 벌을 각오하고 난에 뒤어들었다는 각오가 숨어 있다.
이를 지켜보던 한 천주교 신부가 서울로 제주도에서의 일어난 사태의 심각성을 보고하여프랑스 군함과 정부 진압군이 제주에 도달하였고 파견된 정부 관리에 의해 사태는 수습되게 된다.
민중들의 의견을 받아들인 정부는 주동자만 처벌하고 참여자는 그 일에 대해 불문에 부치는 사후대책을 보장하였고, 프랑스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 천주교들의 시신은 사라봉 아래 황사평에 묻는 것으로 사건은 결말을 짓는다. 그후 이 황사평 묘지는 당시 피살자의 분묘뿐 아니라 점차 제주도 천주교인의 공동묘지로 변해갔고, 현재 천주교 공동묘지로 계속 사용되고 있다.
이재수등 세 장두는 서울로 압송됨으로서 미증유의 사건을 남기고 마무리를 지었다.
한편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의 사형에 대해서는 도민들이 서운하게 생각하여 60년이 지난 신축년(1961년)에 대정읍 보성리에 삼의사비를 세우고 그들의 의로운 정신을 기념하고 있다. 지금은 1998년 마을 청년들에 의해 새로 단장된 기념비가 추사적거지옆 도로변에 외로이 서 있다.
그리고 피의 현장이었던 관덕정 앞마당 지금은 도로로 변해버려 당시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어, 사진으로나마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을뿐이다.
이재수의 난을 보는 시각은 무척 다양하여 아직도 역사적 의의에 대해 정리된 바는 없다. 천주교 입장에서는 교도들의 희생을 강조하여 신축교란(辛丑敎難), 성교난(聖敎亂)등의 명칭을 사용하며, 난의 원인이 제주도내 토착세력들이 그들의 안위를 위해 교세가 확장하는 천주교에 위협을 느껴 대규모 박해를 일으켰다는 주장이며, 향토사가들 입장에서는 프랑스 신부의 세력과 교회권력을 이용하여, 혹은 봉세관의 주구가 되어 갖은 횡포를 부린 불량한 교도들의 소행으로 인하여 발생한 사건이며, 주동자인 이재수등은 정의에 입각하여 도민의 민생을 위해 싸운 것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제주도민들에게 오랫동안 잠재되었던 외부세력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며, 한편 토착세력들이나 지방 관리들은 도민들로부터 경제적인 수취를 독점하기 위하여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경래(京來) 봉세관에 대한 극단적인 저항감과 반감을 노출하게 되었던데서 근본원인이 있었다. 또한 전통적인 민간신앙을 고집하는 도민들의 반감 등이 천주교에 대한 증오로 노출되었으며, 바로 이런 도민들의 천주교에 대한 반감을 이용하여 지방토착관리들이 외부세력에 대하여 무력을 행사했던 민요(民擾)-포악한 정치에 반대하여 백성이 일으킨 소요 -의 성격을 지닌 사건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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