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유배인 가운데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2856)는 제주 문화에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인물이다. 추사는 영조의 사위였던 윌성위 김한신의 증손으로, 당시 승승장구하던 경주 김씨의 집안에 태어났다. 일찍이 북학파의 대가인 박제가의 학문을 전수 받았으며 24세에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다. 이후 병조참판인 부친 김노경을 따라 외교사절단으로 북경을 건너가 중국의 석학들과 교유하며 '해동 제일의 통유'(海東第一通濡)로 이름을 날렸다. 34세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규장각을 거쳤고, 이후 충청도 암행어사, 성균관 대사성, 공조참판, 형조참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다 헌종 6년(1840) 55세 되던 해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중국행을 앞두고서 추사는 안동 김씨 세력과의 권력 싸움에서 밀려나 목숨만 가까스로 건진 채 제주도로 유배되는 처지가 되었다. 대정읍성 동문 바로 안쪽에 그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초가가 있는데, 바로 추사적거지(秋史適居地)이다. 유배 초기에 포교(포도청의 부장)송계순의 집에 머물던 추사는 몇 년후 강도순의 집으로 이사하였다.
현재 추사적거지로 지정된 강도순의 집은, 1948년 4.3항쟁 때 불타버리고 빈터만 남은 것을 1984년 강도순 증손의 고증에 따라 다시 지은 것이다. 대정읍성 동문자리 안쪽에 자리잡은 추사적거지에는 기념관과 함께 초가 한 채가 말끔하게 단장돼 있는데, 이 초가는 굳이 추사가 살았던 집이라는 의미를 담지 않아도 제주 초가의 모범으로 둘러볼 만하다. 초가는 추사기념관을 대문 삼아 드나들도록 돼 있는데, 기념관에는 복사품이기는 하지만 추사의 글씨와 그림 등이 전시돼 있다. 초가는 주인댁이 살았던 안거리(안채), 사랑채인 밖거리(바깥채), 그리고 모퉁이 한쪽에 세운 모거리(별채), 제주식 화장실인 통시와 대문간, 방앗간, 정낭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념관 쪽으로 정낭 하나가 따로 더 마련되어 있지만, 이 집의 본래 정낭은 방앗간과 모거리 사이의 대문간에 있는 것이다.
추사는 밖거리에서 배움을 청해오는 마을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는 한편, 모거리의 작은 방에 기거하며 추사체를 완성하였고, [세한도(歲寒圖)]을 비롯한 여러 점의 서화를 남겼다. 남제주군 대정읍 안성리에 있다. 신제주의 노형노타리에서 대정읍(모슬포)으로 난 서부산업도로(95번 지방도로)를 따라 31Km쯤 가다보면 길 왼쪽에 쌍용동광주유소가 있는 동광육거리가 나온다. 동광육거리에서 앞으로 계속 난 서부산업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바로 길 오른편에 추사적거지가 나온다. 추사적거지 앞 주차장은 대형버스도 여러 대 주차할 수 있을 만큼 넓다. 대정의 돌하르방은 12기가 있는데 모두 길가에 있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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